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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에서 브라질만 포르투갈어를 쓰는 이유

eJungHyun 2011. 1. 9.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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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에서 브라질만 포르투갈어를 쓰는 이유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신대륙 발견 경쟁

 

남미에서 브라질만이 유일하게 포르투갈 어를 사용하고 있고 나머지 나라들은 전부 스페인어를 쓴다. 이것은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식민지였고 나머지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것에서 기인한다. 남미 대륙의 이러한 분할은 지리상 발견의 시대에 두 나라의 경쟁과 타협의 결과였다.

 

14세기경부터 중세부터 중세 봉건 사회는 무너지고 있었다. 봉건 사회의 붕괴와 중세 문화의 황혼 속에서 새로운 근대 사회의 싹이 돋아나고 있었으며 이것은 르네상스, 종교 개혁, 지리상의 발견으로 표현되었다.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1497년 바스코 다 가마의 아프리카를 회항하는 인도 항해, 1519년 마젤란의 세계 일주로 상징되는 지리상의 발견은 유럽 경제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유럽인들이 새로 발견한 지역은 그들의 약탈로 인해 기존의 문명이 파괴되고 혹심한 약탈과 살상이 자행되었다.

 

이런 지리상의 발견의 주동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다. 새로운 인도 항로의 발견자인 바스코 다 가마의 말처럼 지리상의 발견의 동기는 ‘기독교인과 향료’였다. 후추를 비롯한 향료는 지중해를 통한 동방 무역의 주요 상품이었고 당시 이것은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따라서 동방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아랍 상인이나 이탈리아 상인을 거치지 않고 동방과 직접 무역을 할 수 있다면 엄청난 이익을 볼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 지리상의 발견의 동기가 되는 것은 두 나라의 역사에서 유추할 수 있다. 끊임없이 이슬람의 침입에 시달린 두 나라는 이슬람에 대한 적개심과 기독교 전파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따라서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이라는 사람이 다스리는 국가가 아시아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전설은 그들의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만약 이 국가를 발견하고 동맹을 맺는다면 이슬람 세력을 협공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하여 스페인, 포르투갈 두 나라는 경쟁적으로 새로운 땅의 발견에 나서게 된다. 그 중에서도 앞선 것은 포르투갈이었다. 15세기 초반부터 엔리케 왕자는 아프리카 서해안을 남하하여 인도로 가는 항로를 탐험했지만 적도 근방까지만 탐험하고 중단되었다. 이후 1480년대에 국왕 조안 2세의 후원으로 탐험이 재개되었고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1487년에 드디어 ‘희망봉’에 도달했다.

 

한편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확신했고 따라서 서쪽으로 계속 항해하면 인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콜럼버스는 자신의 계획이 실현되도록 도와줄 후원자를 찾고 있었다. 1484년 포르투갈의 국왕 조안2세를 만난 콜럼버스는 자신의 인도 탐험 계획을 열심히 설명하고 후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국왕은 측근들의 의견을 토대로 하여 그를 허풍쟁이 공상가로 단정하여 상대해 주질 않았다. 게다가 당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회항하는 항로 발견에 열심이었다.

 

그리고 희망봉의 발견 이후 포르투갈은 내정의 불안으로 인해 당분간 새로운 항로 개척에 힘을 쏟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포르투갈 국왕에 실망한 콜럼버스는 스페인으로 가 자신의 계획을 후원해 달라고 호소했다. 1492년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의 마음이 움직였고 같은 해 8월 3일 새벽 산타 마리아 호를 비롯한 세 척의 배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출항했다. 이 선단은 출발한지 한 달 가까이 되어 카나리아 제도에 도착했고 거기서 서쪽으로 기수를 돌려 41일 만에 지금의 바하마 제도 중의 한 섬에 도착했다. 콜럼버스가 죽을 때까지 그곳을 인도의 어느 곳이라 믿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1493년 3월 15일 콜럼버스 일행은 자신들이 출발했던 스페인의 팔로스 항으로 귀환했다. 떠날 때는 90여 명이었던 일행이 40명으로 줄었고 그들이 가져온 것도 향료와 금이 아니라 약간의 노예와 금속 제품, 거기에 앵무새와 담배 등 신기한 물건이었지만 각지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에 경쟁 국가인 포르투갈은 큰 충격을 받았다. 한편 스페인은 콜럼버스가 귀국한 즉시 로마 교황에게 새로 발견한 지역이 모두 스페인의 영토임을 인정받고자 했다. 교황은 베르데 제도에서 서쪽으로 약 60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남북으로 선을 그어 그 서쪽의 발견지는 스페인이, 동쪽의 발견지는 포르투갈이 차지한다고 선언했다(인테르 카에테라 교황 교서 ; 1493). 포르투갈 왕은 이에 즉시 항의했고 양국은 약 1년쯤 협의한 후 경계선을 좀더 서쪽인 서경 46도 37분으로 옮겼다. 이것이 토르데실라스(Tordesillas) 조약이다.

 

오늘날 보면 어처구니없는 결정이 조약이라는 이름으로 성립했지만 당시로서는 교황의 권한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유럽인들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조약으로 인해 포르투갈이 브라질로부터 대서양, 아프리카, 인도양, 인도네시아를, 스페인이 아메리카, 태평양, 필리핀을 자기네 영토로 설정하게 되었다. 물론 종교 개혁 이후 다른 유럽 국가들, 특히 프랑스와 영국이 이 조약을 무시하고 영토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이로 인해 남미에서 브라질만 포르투갈 식민지가 되어 포르투갈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기타] 상식 밖의 세계사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신대륙 경쟁'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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